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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양묘산기(衿陽墓山記)    
    금양묘산기(衿陽墓山記) 금천(衿川=금양)지역의 묘소의 위치와 묘전(墓田)의 규모를 정리한 기록이다. 1681년(숙종 7) 이원익의 4대손인 이존도(李存道)와 이형도(李衡道)에 의해 중간된 것이다. 이원익 당대 1차 정리되고 이후 유훈(遺訓)에 의거하여 간행된 것으로 묘전의 정비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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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고(先稿)    
    선고(先稿) 이원익 선생의 5대손 이인복(李仁復, 1683-1730)의 시문집이다. 표지제목은 “선고(先稿)”인데, 이는 사후 후손에 의해 정리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간행되었다면 그의 호에 따라 “신절재집(愼節齋集)”이라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총 6권 가운데 제2권, 제5권만 남아있다. 전시면은 <문충공유금내력전말기(文忠公遺琴來歷顚末記)>로 이원익 선생이 연주하던 거문고를 얻고 난후 파손된 부분을 보완하고 그 경위를 정리한 글이다. 이글은 관감당(觀感堂) 앞의 탄금암(彈琴岩)과 함께 이원익 선생이 거문고를 잘 연주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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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조묘정배향교서(仁祖廟庭配享敎書)    
    인조묘정배향교서(仁祖廟庭配享敎書) 1651년(효종 2) 이원익 선생을 인조의 묘정에 배향한다는 효종(孝宗)의 교서다. 채유후(蔡裕後)가 짓고 민유중(閔維重)이 썼다. 교서내용 가운데 “몸은 옷을 이기지 못할 것처럼 가냘프나 관직을 맡으면 늠름하여 범하기 어렵고, 말은 입에서 나오지 못할 것처럼 수줍으나 일을 만나면 패연히 여유가 있다.”라는 구절을 통해 당시 이원익 선생에 대한 평가가 어떠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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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해사궤장연첩(癸亥賜几杖宴貼)    
    1623년(인조 1) 9월 6일 안석(几)과 지팡이(杖) 및 연회(宴)를 베풀고, 연회에 참석한 빈객(賓客)들이 주고받은 기념 축하시를 모아 만든 시첩이다. ≪오리선생집≫에는 ≪사궤장연창수시첩(賜?杖宴唱酬詩貼)≫이라고 하였다. ≪예기(禮記)≫<곡례(曲禮)>上에 따르면 “대부는 70세가 되면 관직을 반환한다. 만일 사직을 허락받지 못하면 반드시 궤장을 하사받는다.”라는 예법이 있다. 당시 선생이 77세의 나이로 사직하자 기로소(耆老所)에서 기로연(耆老宴)까지 함께 내려진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처음으로 시행된 것으로 전후 문물제도를 새롭게 정비하는 역사적 문화적 의미도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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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액(扁額)    
    1676년(숙종 2) 숙종이 사액한 충현서원의 편액이다. 충현서원은 금천지역의 유일한 서원이자 유일한 사액서원이었다. 사액이라 함은 임금이 편액을 하사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편액에 ‘肅廟`라는 숙종의 묘호가 있다는 것은 이 편액이 숙종 사후에 제작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숙종 사후에 숙종의 글씨를 모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편액 뒷부분에 전주이씨 완평부원군파로 익령군(益寧君)의 15대손인 이교진(李敎鎭)이 충현서원의 도유사(都有司)로 있을 때 별유사(別有司) 최중건(崔中建)의 주장으로 현판을 새로 제작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를 입증하고 있다. *편액 뒷면의 각자 懸板新修(壬戌 回祿後) 都有司 李敎鎭 別有司 崔中建 主張是事 齋任 金秀藎 宋淳祖 己巳三月 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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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액(扁額)    
    미수 허목의 <삼현사기>에 따르면, 1658년에 삼현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이 편액은 사액을 받은 이후 사우의 현판으로 쓰였던 것으로 보이나 자세하지 않다. 현재 이 현판은 1992년에 새로 보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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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액(扁額)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이 지은 삼현사우의 상량문이다. 十室忠信, 共切景仰之誠. 三人我師, 敢缺俎豆之享! 屬?經始, 擧皆?[歡]欣. 竊惟?而祭社之儀, 本出古者彰善之意. 或以功德之盛, 澤被生靈. 或以節義之高, 事光簡冊. ?今一邑, 有此三賢! 雖金火之遞遷, 世代則異, 而日星之尙炳, ?式攸同, 所以幷享[饗]於一堂, 允宜永垂於千 年. 高麗太師開國候, 贈謚仁憲姜公, 吉甫文武. ??詩書, 自致靑雲, 名第一於射策, 早通黃石, 智無雙於運籌. 値丹兵之旣深, 堅素守之不撓, 同魯連之蹈海, ?然高風 徵管仲之尊王, 吾其左?. 奎藻特褒於增秩, 金花親揷於樹勳, 不惟敵愾之忠, 且能爲國以禮. 蓋?精於星斗, 洞傳落星之名, 竟宣威於義旗, 驛改興義之號, 當正色立朝之日, 咸仰濟世而安民. 及乞骸歸田之時, 益篤樂道而求善, 進爲邦家之柱石, 退作邱[丘]壑之棲遲, 堂堂將相之雄姿, 謙謙揖讓之大老. 高麗掌令徐公, 登第於衰末之運, 盡言於諫諍之班, 以孤忠捧日之心, 有一柱擎天之志. ?風蠻雨, 遭斥逐而?危, 國破家亡, 遷井里而寄跡[迹], 採首陽之遺草, 撫栗里之孤松, 望千載之神都, 山河不改, 詠一首之詩句, 禾黍興悲, 獻廟比於夷齊, 流芳百代. 宣祖慰其體魄, 賜祭九原, 民到于今稱之, 人皆以爲高矣. ?我朝議政府領議政完平府院君, 贈謚文忠李公, 松筠貞操, 氷蘖淸?, 備嘗險艱, 別利器於盤錯, 歷試內外, 布惠澤於困窮, 仁聲入人之深, 相業爲世所贊. 霖雨舟楫, 實爲股肱之良, 進退行藏, 綽有明哲之見. 忍聞昏朝之兇論, 瀝盡血?而直諫, 引大舜之烝烝[蒸蒸], 三綱不墜, 懷左徒之眷眷, 九死猶甘. 適丁反正之初, 首膺亮采之命, 衛士加額, 爭瞻司馬之來, ?座虛心, 幾多傅說之沃! 跡類裴度返綠野而無堂, 恩加魏徵?素褥而造舍. 年彌高而德彌?, 生也榮而死也哀, 求諸四海而罕看, 夫何百里之繼出! 請建二公廟, 曾已定於先朝, 合爲三位祠, 似有待於今日. 豈但吾黨二三子之力主! 抑亦擧國千萬人之樂聞. 惟?衿陽, 最近洛邑, 王化所先被. 正似江ㆍ?ㆍ汝ㆍ漢之間, 遺風猶有存, 宛在琴瑟?杖之側. ?彼寒泉之深洞 乃是冠岳之別區, 鳳舞鸞飛, 擁千峰之?繞, 鶴汀鳧渚, 俯一水之??[回], 故此地多士之攸依, 寔當年高?之所及. 風斤月斧, 集工師以課功, 栢板松楹, ?神宇而備制, 想武誼之掃蕩, 見文曲之依佈. 樊塘指點於林端, 梧里密邇於谷口. 萬世瞻仰, 載儼陟降之精靈, 一體祭祀, 同薦春秋之芬苾, 父老觀而拭目, 雲物爲之增輝. 爰擧修樑, ?伸善頌. 兒郞偉?樑東, 靑壁???碧空, 政似當年山立處, 一時冠冕盡?風. 兒郞偉?樑西, ?來山與白雲齊, 分明一髮天邊聳, 持比高標便覺低. 兒郞偉?樑南, 天光雲影水中涵, 長川日夜流無盡, 此理須從靜裏探. 兒郞偉?樑北, 奇峰削立千尋直, 三山氣像似三賢, 想見朝端整笏立. 兒郞偉?樑上, 男兒正氣宜充養, 浩然可塞天地間, 莫使此心?俯仰. 兒郞偉?樑下, 忠義由來衛宗社, 若要生爲大丈夫, 惟須淨掃神明舍. ?願上樑之後, 家絃?誦, 俗變風移, 如圭如璋, 蔚興俊賢之輩, 以妥以侑, 永作禮法之場.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李景奭撰. *이경석의 문집 《백헌집》권15에도 〈삼현사우상량문〉이 수록되어 있다. 몇 군데 글자의 차이가 있으나 같은 뜻과 같은 음을 가진 것으로 문제될 만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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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액(扁額)    
    1658년(효종 9) 미수(眉?) 허목(許穆, 1595~1682)이 삼현사의 유래와 배향한 인물에 대하여 기술한 글이다. 三賢祠記 衿川縣寒泉, 有三賢祠. 三賢祠者, 高麗姜太師ㆍ徐掌令及我宣祖功臣完平李相國祠也. 太師事文宗ㆍ顯宗, 攷典禮修國社, 定方邱ㆍ坎壇之制, 立百官儀, 當契丹南侵, 君臣大恐, *[將]束手乞爲臣僕. 太師正色, 守禮以義, 自固義明, 而人?服. 人?服而國益?, 卒克破契丹. 王歎之曰: “守禮義 不擧國爲左?, 忠臣之烈也.” 擢至內史侍郎平章事, 累加太師, 封開國候, 致仕卒, 謚仁憲, 事在麗史本傳. 徐掌令, 當麗之末世, 見危不去, 及益陽死, 廢爲庶人. 國亡居衿川, 義不忘故國, 坐不北向, 終其身不對漢陽城郭. 託物吟?以自傷, 或論甄謳歌思亂, 當抵罪. 太宗曰: “甄夷齊之倫, 不可罪也.” 至宣祖世, 有宰相尹根壽, 白上封忠臣塚. 李相國事宣祖, 當邦國大亂, 盡?驅馳, 以存社稷. 按節關西, 西民生祭以報之. 開府南方, 南人信之如神明. 光海無道, 壞滅人紀, 相國曰:“國亡, 當受其敗.” 諫而不去, 光海以爲謗己, 疎而逐之. 然?其言, 人心益明, 此天也. 仁祖元年, 復爲中興相, 以身?國家安危, 前後四十年, 八十八卒, 謚曰文忠. 相國相三朝, 尊治?, 重儒術, 好節儉, 明進退之義, 四方歸心, 稱‘宣ㆍ仁世恢復名臣.` 首此數賢者, 其賢宜報食百代. ?祀典曰: “法施於民則祀, 以死勤事則祀, 以勞定國則祀”者乎! 今奉天謂之姜太師鄕, 其生有祥星降, 信耶? 邑居北十里燔塘有徐掌令墓, 蓮城境梧里洞, 有李相國世葬. 初相國與鄕黨父老, 議立二賢祠, 未成而相國卒. 後二十五年, 鄕人?祠相國, 號爲三賢祠. 其立祠之年, 今上卽位之年戊戌也, 其九月上浣, 孔巖許穆記. *[將]은 삼현사기 편액에는 없고, 허목의 문집 『기언(記言)』에는 있는 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