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실은 1층과 2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2층은 영정과 친필 등 이원익과 관련된 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1층에는 종가에서 사용했던 제기와 민속생활품을 중심으로 전시되어 있다. 400여년 전의 유물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사대부집안의 각종 자료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문간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튼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1917년에 문간채는 1940년경에 건립되었다. 안채 들보에 “龍 觀感堂建翌年丁巳閏二月六日未時立柱上樑 龜”라고 씌여 있어 건립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이것은 “관감당을 세운 이듬해 정사년(1917) 윤2월 6일 미시(오후 1~3시)에 기둥을 세우고 동량을 올렸다.”라는 뜻이다. 안채는 13칸 반 규모의 소로수장집인데 2칸 건넌방, 3칸 대청, 2칸 안방이 일렬로 배열되고 안방 안쪽에서 꺽이어 1칸 반 부엌과 1칸 반의 온돌방이 있다. 지붕가구와 기둥 이음, 부엌의 봉창과 다락의 완자창 등은 세련된 목수의 솜씨를 보이고 있다. 문간채는 13칸 반규모인데 대문간 좌우에 온돌방과 부엌, 광이 있다. 현대식으로 고쳐진 부분도 있으나 20세기에 건립된 경기지역 살림집을 잘 간직하고 있다.
1630년(인조 8) 인조(仁祖)가 경기 감사에게 명하여 이원익에게 지어준 집이다. 편액의 의미는 인조가 신하와 백성들에게 이원익의 청렴하고 간결한 생활 자세를 “보고 느끼게 하고자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편액은 어느 때 누가 썼는지는 알 수 없다.
그 건립 경위에 대하여 1694년(숙종 20) 이만성(李萬成)이 정리한 〈사제시상교(賜第時上敎)〉라는 편액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630년 정월 인조가 승지 강홍중(姜弘重)을 보내 이원익을 문안하였다. 이에 ‘두 칸 초가에 겨우 무릎을 들일 수 있는데 낮고 좁아서 모양을 이루지 못하며 무너지고 허술하여 비바람을 가리지 못합니다.' 라고 복명하였다. 인조는 “재상이 된지 40년이나 되었는데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니, 청렴하고 결백하며 가난에 만족하는 것은 고금에 없는 일이다. 내가 평생에 존경하고 사모하는 것은 그의 공로와 덕행뿐이 아니다. 이 공의 청렴하고 간결함은 모든 관료가 스승으로 본받을 바이니, 어찌 백성이 고생하는 것을 걱정하겠는가?”라고 말하고 집을 지어주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이원익 선생은 이곳에서 4년간 기거하다가 서거하였다.
이때 지어진 정당(正堂)은 1637년 병자호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서거 60주년인 1694년에 중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후 다시 어느 시기에 허물어졌다가 1916년 10대손 이연철(李淵哲)에 의해 다시 중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리영우는 오리 이원익 선생의 영정을 모신 집이라는 뜻으로 그를 추모하는 사당이다. 일반적으로 다른 종가의 사당의 경우는 위패를 모시고 있으므로 ‘○○사'라고 불리지만 이곳은 내부에 감실을 따로 두고 영정을 봉안하여 제사를 지내므로 ‘영우'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오리영우는 이름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원익 선생을 제사지내는 일종의 ‘불천위(不遷位)' 사당에 해당한다. 그런데 종가에는 이원익이외에 그의 후손을 제사지내는 별도의 사당이 있어야 한다. 13대손 종손 이승규 박사에 따르면 오리영우 아래 모과나무 자리에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생각건대, 오리영우가 남향을 하고 있고, 앞쪽으로 관감당이 있기 때문에 그의 후손을 위한 사당은 불가피하게 동향을 하도록 설계된 것으로 보인다. 현판은 근곡(芹翁) 이관징(李觀徵, 1618~1695)이 썼다. 현판의 내용은 “1693년(숙종 19) 10월 이원익 선생이 말년에 현 광명시 소하동으로 물러나와 사실 때 인조가 하사한 집인 관감당 옛터에 이 사우를 건립한다.” 라는 뜻이다. 관감당은 1630년(인조 8) 인조가 이원익에게 하사한 집으로 이원익이 말년에 4년 동안을 기거한 곳이다. 그러나 1647년 병자호란으로 소실된 후 건립되지 못하다가 이원익 서거 60주년을 기념하여 1694년(숙종 20)에 중건되면서 오리영우도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