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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서울에 가깝지만 그곳만의 독특한 문화유산 가꾸어 왔다

작성일 :
2019-05-01
조회수 :
1350

20195월 고을학교는 <광명·시흥·안양고을>

  

싱그러운 5,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67강은 서울의 생활권에 포함되지만 그곳만의 독특한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는 광명·시흥·안양고을을 찾아 갑니다.

 

중략

 

오리영우는 이원익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사당입니다. 1630(인조 8)2칸 초가인 선생의 집에서 비가 새므로 왕이 새 집을 하사하였는데 1693(숙종 19) 인조가 하사한 집터 위에 사당을 건립하여 오리영우라 편액하였습니다. 사당 주변에는 담장이 둘러져 있고 앞쪽에는 내삼문이 있어 별도의 영역을 이루고 있습니다. 장대석 기단과 초석은 17세기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세장한 부재 단면, 익공의 형태, 방화벽 등은 19세기 말의 수법으로 보입니다. 작은 규모의 사당이지만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사당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원익영정(보물 1435)은 이원익이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녹훈된 것을 기념해 제작된 것으로 같은 해 조성된 청난공신과 선무공신의 도상에 비해 사모의 모양이 다소 변한 것으로 보아 책록된 시기보다 몇 년 뒤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영정의 형태는 축으로 장정되어 있으며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의 전신상으로 그 모습은 오사모(烏紗帽)에 흑단령(黑團領)을 입고 공수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사모의 양쪽에는 구름 문양이 있고 얼굴에는 음영 효과가 거의 없으며 이목구비의 형용은 선묘 위주로 되어 있고 족좌대 위에 흑피혜(黑皮鞋)와 채전(彩氈)이 깔려 있어 공신상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관감당(觀感堂)1630(인조 8) 인조가 경기감사에게 명하여 이원익에게 지어준 집입니다. 당호는 인조가 신하와 백성들에게 이원익의 청렴하고 간결한 생활 자세를 보고 느끼게하고자 한다는 뜻에서 내린 것인데, 그 건립 경위는 이만성이 정리한 사제시상교(賜第時上敎)라는 편액에 자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이원익은 이곳에서 4년간 기거하다가 죽었는데 이때 지어진 정당은 1637년 병자호란으로 소실된 것을 서거 60주년인 1694년에 중수하였고 그 후 다시 허물어졌다가 191610대손 이연철에 의해 중건되었습니다.

 

이원익 종택은 자형 안채와 자형 문간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튼 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안채는 1917년에, 문간채는 1940년경에 건립되었습니다. 안채 들보에 관감당을 세운 이듬해 정사년(1917) 26일 미시에 기둥을 세우고 동량을 올렸다(龍 觀感堂建翌年丁巳閏二月六日未時立柱上樑 龜)”라고 씌어 있어 1658년 이원익이 살던 집터에 사원을 창건하였다가 훼철된 후 다시 일반주택으로 변경시킨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탄금암(彈琴岩)은 이원익이 거문고를 연주하던 바위입니다. 거문고는 선비의 악기로 알려져 있는데 <오리집> ‘연보(年譜)’에 따르면, 선생은 현재 동숭동 인근에 살 때 자주 낙산(駱山)에 올라 거문고 연주를 즐겼다고 합니다. 또한 이원익의 5대손 이인복의 문집에도 <문충공유금내력전말기(文忠公遺琴來歷顚末記)>가 있어 선생이 거문고를 좋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탄금암은 이원익 선생이 청백리로 근검한 생활도 실천하였을 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정통하였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출처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no=239170&utm_source=naver&utm_medium=search#09T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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