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손 내외가 4년 간의 신혼생활을 지냈던 종가는 이제 박물관이 되어 조심스러웠던 속내를 모두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접살림을 차리기도 하고 조상 대대로 내려온 유산까지 함께 사용했던 곳이기에 관장내외에게는 더욱 많은 애착과 애정이 생긴 곳입니다. 생활의 편의를 위해 현대적으로 바뀐 부분도 많지만 여전히 종가는 그만의 풍채와 위엄을 자랑합니다. 유서 깊은 가문과 종부가 지켜낸 안방의 모습이 어떻게 보존되고 바뀌었는지 한눈에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관복장 官服欌
85.8×47.7×167cm
10대 종부(고령 申씨)가 시집 올 때 해온 오동나무 관복장. 현재 13대 종부는 아이들 방에 옷장으로 사용했다. 단령이나 장신구를 보관하던 조선시대 전통 관복장이 아닌 개화기 이후 다량 생산되던 의걸이장으로 보인다. 전통 관복장처럼 외부 형식은 2층이지만 위층과 아래층에 층널이 설치되어 관복장의 단층구조와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오동나무이층농
78.0×41.9×17.0cm
11대 종부(고령 申씨)가 시집올 때 해온 오동나무 이층농. 놋쇠 장석과 원형경첩을 부착하고 다리는 앞과 옆 모두 박쥐풍혈을 내어 귀장식을 했을 뿐 소탈하고 꾸밈새 없이 자연미가 살아있다. 방의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했던 장과 농은 방의 분위기를 주도했는데, 나뭇결의 원형을 살리면서 기교를 부리지 않고 수직과 수평의 직선만으로 현대적 감각을 드러내던 전통가구의 멋과 수납에 초점을 맞춘 실용성이 돋보인다.
삼층화류농(三層樺榴籠)
79.3×41.1×54.7cm
12대 종부(강릉 崔씨)가 혼수로 해온 가구. 화류목과 자개장식이 화사한 삼층농으로 형태는 전통적인 3층장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층이 각각 분리된다. 2층의 접이식 여닫이와 3층의 거울 붙인 여닫이는 장과 농의 명확한 구분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일제강점기시대 가구의 특징을 보여준다.
세이코(Seiko) 벽시계
20×53.5×9cm
종가의 마루에 걸려있던 괘종시계로 1920년대 부유층들의 경제력 과시품목 중 하나였다. 13대 종부가 시집왔을 때 종가 안마루 벽에 걸려있던 이 시계는 공놀이 하던 아이들 때문에 지금은 유리가 없고, 누렇게 된 숫자판을 새것으로 갈아 보관하고 있다. 종부는 Seiko란 글씨가 박혔던 숫자판을 원형 그대로 두지 않고 바꾼 것을 철이 없어 한 일이라며 후회한다.
지장함(紙欌函)
60.5×36.5×33.0cm
이원익의 친필 유물들이 모두 보관되어 있던 지장함으로, 버드나무 가지를 깎아서 만든 상자라 하여 버들고리라고도 한다. 버드나무 가지로 백골을 짜고 그 안팎에 기름종이를 배접해 만든 지장함은 실용성과 심미성을 갖춘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가구로 시문 없이 간결하다. 색채와 무늬를 치장하지 않은 소지(素地) 지장 가구의 담백하고 소박한 외관은 선비들의 사랑방 치장 분위기에 적합하다.
책꽂이
22.1 × 69.2 × 94.9㎝
오리 선생의 13대 종손이 사용했던 책꽃이.
못질 한번 하지 않고 일일이 손으로 깍고 다듬어 짜맞춘 흔적이 생생하다. 나뭇결과 짜임 모양을 그대로 살린 책꽃이는 일부러 멋 부린 요즘의 것보다 한층 멋스러워 보인다.
책상
72.9×47.1×43.8cm
13대 종손이 사용했던 책상. 1945년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초등학교 시절 줄곧 사용했다. 이 시기는 일제의 영향을 받아 일본과 전통 가구의 혼합양식이 나타나는데 종손의 책상은 평좌 생활에 적합한 문방가구로, 사용하는 이가 편리하도록 제작되어 고개를 숙여서 책을 읽어야 하는 불편함을 덜어주었다.
백동(白銅)재떨이
높이 2.3cm 입지름 22.9cm 바닥지름 17.6cm
10대 종부(고령 申씨)가 안방에서 늘 사용하던 것으로 긴 담뱃대와 쌈지는 없어지고 재떨이만 남아 있다. 재떨이에 1920년에 설립한 ‘朝鮮蠶絲會(조선잠사회)’와 ‘模範養蠶家余彰(모범양잠가여창)’이 예서체로 양각되어 있어, 고령신씨가 임진년(1952년)에 돌아가셨으니 그 사이에 제작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백동재떨이는 황동보다 귀해 장식품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종가 대모님들은 거의가 담배를 피워 13대 종부는 집안행사가 있으면 담배를 구입해 두었다가 대모님들이 오시면 나누어 드리고, 재떨이를 함께 준비했다.
놋쇠다리미
너비 9.4cm 길이 48.5cm 높이 6.2cm
용기 안에 숯불을 담아 사용하던 다리미로 일제강점기 시대에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릴 때 달군 숯불은 온도가 높아 살균 효과가 있고 곰팡이나 해충의 알을 죽이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섬유를 오래 보존 할 필요가 있을 때 이용되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한 사람은 다리고 한 사람은 다리미거리를 잡아주면 된다. 다림질 할 때 숯불 담은 다리미는 받침 그릇 위에 올려놓고 옆에는 반드시 부채를 준비했다.
가마요강
좌ㆍ우 최대지름 14.5cm 바닥지름 8cm 높이 7cm
가마요강은 먼 신행길을 가야하는 신부를 배려해주던 규방용기로, 좁은 가마 안에서 용변보기 알맞게 매우 작다. 신행용 요강은 지승(紙繩)요강이라 하여 기름먹인 한지를 꼬아 만든 것이 제격이지만 놋요강을 더 많이 썼고, 가마요강은 여성뿐만 아니라 관리들이 수행길에 가져가기도 했다. 가마요강이라고 하지만 조그만 백자항아리 모양에 뚜껑까지 있어 타구(唾具)로 쓰이기도 했다. 활용도가 높은 놋요강은 놋대야와 더불어 옛날 혼수의 필수품이었다.
놋화로
높이 17.4cm 입지름 35.5cm 바닥 지름 24.6cm
10대 종부(고령 申)씨가 시집올 때 갖고 온 놋화로. 조선시대부터 부잣집에서나 볼 수 있었던 화로로 넓은 전과 개다리가 특징이다. 숯불을 담아 안방에서 난로로 사용되었는데, 불씨를 보존해 차나 찌개를 끓이고 바느질 할 때의 인두꽂이로도 활용되었다. 특히, 담배를 즐겨 태우던 고령신씨와 집안 어른들이 담뱃불 부칠 때 자주 사용했다. 일제강점기 공출 바람에도 종가의 안방을 지켜낸 화로는 담배를 자주 피우던 13대 종손의 대고모님이나 대모님들이 방문하시면 불 부칠 때 항상 이용해 종부의 애착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