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존도 영정 李存道 影幀
1740년, 비단채색, 148.0×82.0㎝
이원익의 4세손인 완성군 이존도(完成君 李存道, 1659~1745)의 영정으로, 화면 우측상단에 시문이 남아 있으나 박락이 심하여 전체 내용의 파악은 어렵다. 다만 “세경신맹동(歲庚申孟冬)…망와서(忘窩書)”라고 적혀 있어, 경신년인 1740년(영조 16)에 그린 이존도의 82세상 미루어 1740년(영조16) 이존도가 82세 때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영정은 공수(拱手)자세를 취하고 좌안팔분면(左顔八分面)에 몸은 정면을 향하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홍조를 띠는 사실적인 안면묘사와 명암을 넣은 관복의 표현 등에서 18세기 전반기 초상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존도 교지 李存道 敎旨
1729년(영조 5) 6월, 78.0×54.0㎝
1729년(영조 5) 6월 61세인 이존도에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임명한다는 교지이다. 동지중추부사는 중추부의 종2품의 관직이다. 중추부는 관장하는 직무는 없고 문관과 무관 중에서 당상관으로 소임이 없는 자를 대우하기 위한 관청이다.
이존도 처 안동권씨 교지 李存道 妻 安東權氏 敎旨
1729년(영조 5) 6월, 81.0×60.0㎝
1729년(영조 5) 법전에 의거하여 남편 이존도의 직급에 따라 그의 아내인 숙인(淑人) 안동권씨를 정부인(貞夫人)으로 임명한다는 교지이다. 이존도가 2품인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면서 그 아내도 함께 정부인이 된 것이다. 나중에 권씨는 아들 이인복(李仁復)의 현달로 1품인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된다. 조선시대 ‘부인’이란 아무 아내에게나 붙이는 호칭이 아니라 반드시 2품 이상의 아내에게만 주어지는 호칭이었다. 오늘날은 존칭의 의미만 살아 있는 것이 예전과 다를 뿐이다.
이인복 백패 李仁復 白牌
1705년(숙종 31) 10월, 45.0×101.0㎝
1705년(숙종31) 10월 이원익의 5대손 이인복(李仁復,1683-1730)이 생원시에 2등 제19인으로 합격했음을 증명하는 백패(白牌)이다. 백패는 생원, 진사 등과 같은 소과합격자들에게 내려주는 교지이다.
이인복 홍패 李仁復 紅牌
1714년(숙종 40) 11월, 70.0×96.0㎝
1714년(숙종 40) 11월 이인복[32세]이 문과 갑과의 제3인으로 합격했음을 증명하는 홍패(紅牌)이다. 이인복은 급제 당시 의금부 도사로 중훈대부였다. 문과는 갑과(甲科)에 3명, 을과(乙科)에 7명, 병과(丙科)에 23명을 뽑는다. ‘홍패식(紅牌式)’이라 해서 『경국대전(經國大典)』「禮典」에서 규정한 양식대로 쓰게 되어 있으며, “과거지보(科擧之寶)”라는 도장을 찍었다.
이존도 유서 李存道 遺書
1734년·1735년·1737년, 53.0×166.0㎝
이존도가 1734년(영조10), 1735년(영조11), 1737년(영조13) 3차례에 걸쳐 작성한 유서(遺書)이다. 여기에는 품계에 따라 제사(祭祀)를 지내는 규범에 관해 상세히 적었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을 명기한 부분도 눈에 띈다. 또한 검소의 덕목을 유난히 강조하는 부분에서 이원익의 청백리 정신이 종가에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녹표
조선시대의 월급명세서로, 이원익의 4세손인 이존도(李存道)의 것이다. 조선시대 관리들의 급여는 조선전기에는 1년에 4번 계절별로 지급되었다가, 이후 1671년(현종 12)부터 월급제로 바뀌었다. 녹표에 적혀있는 급여는 쌀 2석 2두, 콩 1석 5두이며, 감찰과 당시 관리들의 녹봉을 담당하는 기관인 광흥창(廣興倉) 관리의 수결(手決)이 보인다.
전사통감 全史通鑑
18세기, 22.0×35.0㎝
이원익의 4세손 이존도(李存道, 1659~1745)의 대표적인 저술이다. 이존도의 박학강기(博學强記)의 풍모를 이해할 수 있는 사서이다. 공자(孔子)의 역사저술 『춘추(春秋)』에 근본을 두고, 송대 주희(朱熹)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범례에 근거하여 저술한 통감체의 중국 역사책이다. 여기에 명나라 학자 장시태(張時泰)의 『속강목광의(續綱目廣義)』 등 명나라의 연구성과도 활용한 것이어서 조선후기 통감에 의거한 역사인식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국내 유일본 자료로서 서지학적, 사학사적 가치가 높다.
정확한 저술 연대는 확인하기 어렵다. 수록범위는 신화시대인 복희(伏犧)로부터 원(元)나라 말기까지를 다루었다. 본래 60권으로 저술되었으나 현재 40권만 현존한다.
이인복, 선고 先稿
18세기중반, 27.3×19.0㎝
이원익 선생의 5대손 이인복(李仁復, 1683-1730)의 시문집으로, “선고(先稿)”는 사후 후손에 의해 정리되었음을 보여준다. 총 6권 가운데 제2권, 제5권만이 종가에 남아있다. 문집 내용 중, 이원익 선생이 연주하던 거문고를 구해서 파손된 부분을 수리하고 그 경위를 정리한 기록이 있어, 탄금암(彈琴岩)과 함께 이원익 선생이 거문고를 연주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