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해사궤장연첩(癸亥賜杖宴貼)
48 × 35.5㎝
1623년(인조 1) 9월 6일 안석()과 지팡이(杖) 및 연회(宴)를 베풀고, 연회에 참석한 빈객(賓客)들이 주고받은 기념 축하시를 모아 만든 시첩이다. ≪오리선생집≫에는 ≪사궤장연창수시첩(賜?杖宴唱酬詩貼)≫이라고 하였다.
≪예기(禮記)≫〈곡례(曲禮)〉上에 따르면 “대부는 70세가 되면 관직을 반환한다. 만일 사직을 허락받지 못하면 반드시 궤장을 하사받는다.”라는 예법이 있다. 당시 선생이 77세의 나이로 사직하자 기로소(耆老所)에서 기로연(耆老宴)까지 함께 내려진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처음으로 시행된 것으로 전후 문물제도를 새롭게 정비하는 역사적 문화적 의미도 담겨있다.
오리집(梧里集) 1722년(경종2)
34.1 × 21.3㎝
총 9책으로 구성된 오리선생문집(梧里先生文集)으로, 표제에는 ‘오리집(梧里集)’이라 명기되어있다. 이원익의 문집은 『오리선생문집(梧里先生文集)』과 『오리속집(梧里續集)』이 전해지는데, 원집(原集)과 속집(續集)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집은 1691년(숙종17) 증손 상현(象賢)이 조경(趙絅)과 허목(許穆)의 서문을 받아 간행하였고, 속집은 1705년(숙종31) 4세손인 존도(存道)가 누락된 유문(遺文)과 『승정원일기』 등에서 관련 기사를 정리하여 이서우(李瑞雨)의 서문과 강영(姜楧)의 발문을 붙여 간행한 것이다. 충현박물관 소장본은 1722년(경종 2) 5대손 이인복(李仁復)이 안동부사로 있을 때 보완하여 펴낸 중간본으로, 발문에 따르면 낙판과 결자가 많아 바로잡고 습유(拾遺)의 시문(詩文)과 서독(書牘) 몇 편을 보충하여 추가로 판각하였다고 한다.
인조묘정배향교서(仁祖廟庭配享敎書)
88.5 × 364㎝
1651년(효종 2) 이원익 선생을 인조의 묘정에 배향한다는 효종(孝宗)의 교서다. 채유후(蔡裕後)가 짓고 민유중(閔維重)이 썼다. 교서내용 가운데 “몸은 옷을 이기지 못할 것처럼 가냘프나 관직을 맡으면 늠름하여 범하기 어렵고, 말은 입에서 나오지 못할 것처럼 수줍으나 일을 만나면 패연히 여유가 있다.”라는 구절을 통해 당시 이원익 선생에 대한 평가가 어떠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계첩
41 × 26.4㎝
이원익이 어떤 관청의 으뜸벼슬인 도제조(都提調)에 재임할 때 있었던 해당관청의 계모임에 대한 계첩으로 추정된다. 관직에 호성공신이 포함된 것으로 보아 1604년 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연보에 따르면 1615년(광해군 7) 사역원도제조를 사직했다는 기사가 보여 사역원 도제조일 때의 자료로 생각된다. 이원익은 중국어에 뛰어나 임금이 친히 시험보일 때 마다 우등을 차지할 정도였다.
사람을 보내며
86 × 55㎝
送人
사람을 보내며
男兒有命信蒼蒼
사나이의 앞날은 멀고 멀리니
匹馬秋風到漢江
필마로 갈바람 속에 한강 닿거든
事業必須勤着力
사업은 반드시 부지런히 힘써야 하리
靑燈正好照書
푸른 등불이 마침 서재를 잘 비쳐 주리니
김소년(金少年)에게
86 × 54㎝
贈金少年-自知
김소년(金少年)에게
晩歲讀書徒自悔
만년에 글 읽으면 부질없이 뉘우쳐
令人掩卷卽茫然
책 덮고는 곧바로 멍해지게 하더라
金生此日年方少
김생은 이제 한창 나이 젊으니
好向窓前更着鞭
창 앞에 가 다시 더 힘써 보구려
癸酉暮春出貽孫女季溫六首 1633년(인조 11) 늦봄 손녀 계온(季溫)에게 여섯 수를 써서 주다.
양자강
86 × 54㎝
楊子江
양자강
貫楚呑吳氣像雄
초를 꿰고 오를 삼켜 기상이 씩씩하니
如今四海此朝宗
지금은 사해가 이것을 조종으로 삼는구나
流若問江源去
강물을 거슬러 올라 근원 묻는다면
直到峨嵋第一峰
곧장 아미산의 제일봉에 닿으리라
한거
82 × 54㎝
한거
臨溪茅屋獨閑居
시냇가 초가집에 한가히 사노라니
月白風淸興有餘
달 밝고 바람 맑아 흥이 넘치는구나
外客不來山鳥語
속세 손님 오지 않고 산새 지저귈 제
移床竹塢臥看書
대숲에 옮겨 누워 옛 책을 본다